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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샹그릴라! 그리스!/그리스여행기

[두번째 그리스여행]7 이스트미아 코린트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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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협을 뜻하는 isthmus는 그리스어로 ‘목’이란 뜻이다. 이스트미아란 지명 역시 보이오티아와 펠로폰네소스를 잇는 길목의 도시로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지금의 이스트미아는 코린트 해협의 남쪽 출구 양편으로 길게 펼쳐져 있는데 고대 이스트미아 유적은 서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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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미아는 올림피아, 델파이, 네메아와 함께 오늘날의 올림픽 경기를 추최하는 폴리스였다. 다른 곳들은 비교적 외딴 곳에 위치한 반면 이스트미아는 아테네와 코린트의 중간에 위치해 더욱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미친 아비 아타마스 왕에게 쫒긴 메리케르테스와 왕비 이노가 절벽에서 바다로 투신 자살한다. 돌고래들이 메리케르테스의 시신을 이스트미아 해변으로 가져와 삼촌 시지푸스에게 전한다.   바다의 요정 네레이드는 죽은 영혼을 기리는 경기를 개최하도록 한다.  기원전 582년에 시작되었으며 스포츠 경기는 올림피아 경기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경기의 운영은 코린트가 주로 맡았는데 올림피아 게임의 전년도와 후년도에 개최되었다.

기원전 336년 알렉산더 대왕은 이 경기에서 페르시아를 무찌르는 그리스의 리더로 선언되었고, 기원전 196년 로마의 플라미니우스는 마케도니아의 지배로 부터 그리스의 독립을 선언하기도 했다.


흔적도 희미한 유적은 오후 세시만 되면 문을 닫아 나그네를 당황스럽게 한다. 멀리 보이는 중앙의 포세이돈 신전을 보는 걸로 만족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지만 크게 후회할 일은 없다.  교통이 편한 만큼 해적의 침입도 잦아 고대 흔적은 중세에 이미 거의 사라졌다.

이스트미아의 가치는 유적과는 아무 상관없는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항구에서 서쪽으로 왕복 이차선 포장도로가 이어지는데 왼쪽에 펼쳐지는 에게해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다. 종종 수영복만 입은 젊은이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모습도 보인다. 태양과 젊음이 넘쳐흐르는 해변의 정취가 마음을 설레게 한다.

해변엔 가족과 연인 몇 팀이 해수욕을 즐긴다. 작은 차돌과 굵은 흙이 섞인 해변은 자유로운 일탈을 부추긴다. 

맥주 한병을 시키고, 웃통도 벗어 던지고 바다를, 자유를 즐긴다.


그리스에선 수영복을 겸할 수 있는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바다가 가까운 곳에선…

멀리 코린트 운하를 빠져 나온 배가 남쪽으로 향한다. 바닷물은 시원함을 느끼게 따뜻하다. 옆자리에는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가 2남 2녀와 해수욕을 나왔다.  

학교와 직장에서의 열기를 저렇게 식히고, 저녁을 먹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여름 일상인 것 같았다. 나란히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행복한 가족의 모습에서 여행자 또한 행복을 느낀다.

근대에 와서 이스트미아는 코린트 운하로 다시 한번 유명해진다.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가 정복하지 못한 몇 안되는 사업이 이곳에 운하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1893년이 되어서야 성공한 운하는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운하 옆에는 건설한 사람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20세기 후반으로 들면서 화물선이 대형화해 운하는 그 효용이 떨어지고 지금은 작은 유람선이나 개인용 요트들이 주로 다닌다. 남에서 북으로 본 운하는 양 옆에 절벽이 대단하다.

몇 해 전 '꽃보다 할배'란 여행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찾아왔던 코린트 운하의 버스정류장이 운하 근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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