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체스 — 그리스 독립 전쟁의 여걸이 살던 섬을 요트로 찾아가다 | 지중해 세일링
세일링 여행기 — 21 / 사로닉 만 시리즈
스페체스 — 그리스 독립 전쟁의 여걸이 살던 섬을 요트로 찾아가다
이드라도, 포로스도 아닌, 사로닉 만의 마지막 보석
이드라를 떠난 건 아침 9시였습니다. 남동쪽으로 침로를 잡으면 10nm, 약 2시간의 항해입니다. 이드라의 회색 바위가 뒤로 멀어지자 바다가 열렸습니다. 멜테미(Meltemi)가 불기 시작한 7월이었지만, 사로닉 만의 남쪽은 아직 바람이 온순했습니다. 11시쯤 스페체스(Spetses)의 윤곽이 나타났을 때, 첫인상은 "녹색"이었습니다. 이드라가 바위의 섬이라면, 스페체스는 소나무의 섬이었습니다. 해안선을 따라 짙은 녹색의 소나무 숲이 물가까지 내려와 있었습니다.
스페체스는 사로닉 만의 네 섬(아이기나, 포로스, 이드라, 스페체스) 중 가장 남쪽에, 그리고 가장 멀리 있습니다. 아테네에서 직항 페리가 없어 관광객이 적고, 이드라의 화려한 명성에 가려 한국어 여행 정보도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스페체스에는 다른 섬에서 사라진 것이 남아 있습니다 — 느린 시간, 조용한 골목, 그리고 200년 전 오스만 제국에 맞서 함대를 이끌었던 여성 제독의 이야기.
정박: 올드 하버와 다피아 항구
이드라에서 10nm, 약 2시간 / 포로스에서 15nm, 약 3시간
스페체스에는 두 곳의 정박지가 있습니다. 올드 하버(Baltiza)는 섬 북쪽의 깊은 만으로, 과거 조선소가 있던 곳입니다. 수심이 얕고(2~4m) 차폐가 완벽해 밤새 조용합니다. 타운 키에 스턴투(stern-to)로 접안할 수 있는데, 공간이 넉넉하지 않으므로 오후 1시 전에 도착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정박비는 무료이거나 €10~15 수준으로 매우 저렴합니다.
다피아(Dapia) 항구는 섬의 메인 항구입니다. 페리가 드나드는 곳이라 파도와 웨이크(wake, 선박 항적파)가 있어 밤새 정박하기에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을의 중심에 있어 레스토랑, 카페, 상점에 바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짧은 기항이라면 다피아, 하룻밤 묵을 거라면 올드 하버가 현명한 선택입니다.
스페체스의 앵커링도 가능합니다. 섬 남쪽의 아기이 아나르기리(Agioi Anargyroi) 해변 앞에는 수심 5~8m의 모래 바닥이 있어 앵커링하기 좋습니다. 이곳에서 수영한 뒤 배에서 점심을 먹는 것은 이 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 중 하나였습니다.
스페체스 정박 정보
- 올드 하버(Baltiza): 무료~€15, 수심 2~4m, 타운 키 접안, 차폐 우수
- 다피아 항구: €10~20, 페리 항적파 주의, 마을 중심 접근 좋음
- 아기이 아나르기리 앞: 무료 앵커링, 수심 5~8m, 모래 바닥, 남풍 노출 주의
- 수도/전기: 올드 하버에서 제한적으로 이용 가능 (요청 시)
- 연료: 다피아 항구 근처 주유소에서 제리캔 보급 가능
자동차가 (거의) 없는 섬
이드라는 자동차가 완전히 금지된 섬으로 유명합니다. 스페체스는 이드라만큼 엄격하지는 않습니다 — 쓰레기 수거차, 구급차, 그리고 소수의 허가 차량이 다닙니다. 하지만 일반 관광객의 자동차 반입은 금지되어 있고, 섬 주민들도 대부분 스쿠터나 자전거, 또는 말이 끄는 마차를 이용합니다.
항구에서 내려 골목을 걸으면 이 규정의 효과가 바로 느껴집니다. 매연 대신 소나무 향, 엔진 소리 대신 말발굽 소리, 경적 대신 새소리. 해안가를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는 약 12km로 섬을 한 바퀴 도는데, 소나무 숲 사이로 맑은 바다가 보이는 구간이 계속됩니다. 자전거를 빌리면 3~4시간에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습니다. 자전거 대여비는 하루 €8~12 정도입니다.
라스카리나 보우볼리나 — 오스만에 맞선 여성 제독
스페체스를 이야기하면서 이 사람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라스카리나 보우볼리나(Laskarina Bouboulina, 1771~1825). 그리스 독립전쟁(1821~1829)에서 자신의 재산으로 군함을 건조하고, 직접 함대를 이끌어 오스만 해군과 싸운 여성입니다.
보우볼리나는 부유한 선주 가문에서 태어나, 두 번의 결혼과 사별을 겪으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습니다. 1821년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사재를 털어 전함 '아가멤논(Agamemnon)'을 건조하고, 8척의 함대를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해안의 오스만 요새들을 공격했습니다. 나프플리오 봉쇄작전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고, 트리폴리 함락에도 참여했습니다. 러시아 제국에 의해 "러시아 해군 제독"의 명예 칭호를 받은 최초의 여성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배의 뱃머리에 서서 오스만 요새를 향해 대포를 쏘라고 명령했다. 지중해의 바람이 그녀의 깃발을 펄럭였고, 수백 명의 선원들이 한 여성의 지휘 아래 항해했다. 1821년, 이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보우볼리나 박물관은 올드 하버 뒤쪽 골목에 있습니다. 그녀가 살았던 저택을 개조한 곳으로, 가이드 투어(약 30분)로만 입장할 수 있습니다. 입장료 €6. 전함 모형, 무기, 개인 소장품, 그리고 그녀의 극적인 삶을 설명하는 전시가 있습니다. 가이드는 영어와 그리스어로 진행됩니다. 이 박물관을 방문하고 나면, 올드 하버에 정박한 요트가 다르게 보입니다 — 200년 전, 이 같은 항구에서 전함이 출항했다는 사실이 실감되기 때문입니다.
다피아 항구 앞 광장에는 보우볼리나 동상이 서 있습니다. 대포 위에 한 손을 올리고 바다를 바라보는 자세입니다. 매년 9월에는 스페체스에서 '아르마타(Armata)' 축제가 열리는데, 보우볼리나의 나프플리오 해전을 재현하는 행사입니다. 항구에서 모형 터키 함선에 불을 지르는 장관이 펼쳐집니다.
아나르기로스 대학과 네오클래식 건축
다피아 항구에서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10분 걸으면, 해변가에 압도적인 규모의 네오클래식 건물이 나타납니다. 아나르기로스-코르길레니오스 대학(Anargyreios and Korgialenios School). 1927년 설립된 사립 기숙학교로, 영국의 이튼 칼리지를 모델로 만들어졌습니다. 현재는 수업이 진행되지 않지만, 건물과 정원은 보존되어 있어 외부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이 학교에서 공부한 유명한 졸업생이 있습니다. 존 파울즈(John Fowles) — 영국 소설가. 그는 1951~1953년 이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The Magus(1965)를 썼습니다. 소설의 배경인 가상의 그리스 섬 '프락소스'는 바로 스페체스입니다. 소설 속 묘사를 읽고 스페체스를 방문하면, 파울즈가 본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됩니다.
해변과 수영
스페체스의 해변은 이드라보다 모래가 많고 접근이 편합니다.
아기이 아나르기리(Agioi Anargyroi)는 섬 남서쪽에 있는 가장 큰 해변입니다. 소나무 숲이 해변 뒤까지 내려와 그늘을 만들어주고, 물은 맑고 얕아서 수영하기 좋습니다. 요트에서 앵커링하고 딩기로 해변에 가거나, 마을에서 수상 택시(€10~15)를 타고 갈 수 있습니다. 해변에 선베드(€8~10/세트)와 작은 카페가 있습니다.
조게리아(Zogeria)는 섬 남쪽의 숨겨진 만입니다. 접근이 어려워 사람이 적고, 소나무에 둘러싸인 자갈 해변이 비밀스럽습니다. 요트로 만 안에 앵커링하면 독차지할 수 있습니다. 수심 4~6m, 모래+자갈 바닥.
브렐로스(Vrelos/Bekiri)는 올드 하버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작은 해변입니다.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수영 장소로, 오후에 잠깐 바다에 뛰어들고 싶을 때 적당합니다.
먹을 것: 해산물과 아몬드 쿠키
스페체스의 타베르나는 이드라만큼 비싸지 않습니다. 다피아 항구 뒤편 골목의 Patralis는 현지인들이 가는 해산물 식당으로, 그릴드 옥토퍼스(문어 구이) €12, 신선한 생선 1kg 기준 €40~50 정도입니다. 올드 하버 근처의 Tarsanas는 해변가 테이블에서 석양을 보며 식사할 수 있는 곳으로, 분위기 값이 포함되지만 그래도 흐바르나 이드라보다 20~30% 저렴합니다.
스페체스의 특산물은 아몬드 쿠키(Amygdalota)입니다. 아몬드 가루, 설탕, 로즈워터로 만든 하얀 쿠키인데, 입에 넣으면 부서지면서 달콤한 장미향이 퍼집니다. 항구 근처 빵집에서 €2~3에 한 봉지를 살 수 있습니다. 요트의 오후 간식으로 완벽합니다. 그리스 커피와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세일러에게 스페체스가 좋은 이유
사로닉 만의 세일링 루트는 보통 이렇게 짜여집니다: 아테네 → 아이기나 → 포로스 → 이드라 → 아테네 복귀. 4~5일이면 충분한 루트이고, 대부분의 세일러가 이 코스를 탑니다. 하지만 7일이 있다면 스페체스를 추가할 수 있습니다. 이드라에서 스페체스까지 10nm, 스페체스에서 아테네로 직접 돌아가면 약 45nm(8~9시간)입니다. 혹은 포로스를 경유하면 나눠서 항해할 수 있습니다.
사로닉 만 확장 루트 (7일)
아테네 → 아이기나 → 포로스 → 이드라 → 스페체스 → 포로스 경유 → 아테네스페체스가 세일러에게 좋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이드라에서 느낀 "아, 이런 섬이 있구나" 하는 감동이 스페체스에서 한 번 더 찾아옵니다. 그런데 방향이 다릅니다. 이드라가 바위와 예술의 섬이라면, 스페체스는 숲과 역사의 섬입니다. 이드라가 세련된 도시인이 모이는 곳이라면, 스페체스는 아테네 가문들이 여름 별장을 짓는 조용한 피서지입니다. 두 섬을 연달아 방문하면 사로닉 만의 다양한 얼굴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사로닉 만 세일링의 전체 루트와 계획은 사로닉 만 7일 루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드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별도의 도시 시리즈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스페체스 실전 정보
스페체스 한눈에 보기
- 위치: 사로닉 만 최남단, 이드라에서 10nm, 포로스에서 15nm
- 정박: 올드 하버(무료~€15) 또는 다피아 항구(€10~20)
- 교통: 자동차 반입 금지 (허가 차량만). 자전거·스쿠터·수상택시
- 필수 방문: 보우볼리나 박물관 (€6, 가이드 투어 30분)
- 해변: 아기이 아나르기리 (소나무+모래), 조게리아 (숨겨진 만)
- 음식: 해산물 타베르나 €15~25/인, 아몬드 쿠키 €2~3/봉지
- 9월 축제: 아르마타 — 보우볼리나의 해전 재현, 모형 함선 점화
- 최적 시기: 5~6월, 9~10월 (여름은 아테네 피서객으로 혼잡)
"스페체스를 떠나며 뒤를 돌아보았다. 소나무 숲 위로 석양이 내리고 있었다. 200년 전, 보우볼리나도 이 항구에서 바다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같은 바다, 같은 바람, 같은 소나무 향. 다만 그녀의 배에는 대포가 실려 있었고, 내 배에는 올리브유와 와인이 실려 있을 뿐."
사로닉 만의 네 섬 — 아이기나, 포로스, 이드라, 스페체스 — 은 각각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기나는 피스타치오와 고대 신전, 포로스는 레몬 숲과 해군 기지, 이드라는 예술과 당나귀, 스페체스는 소나무와 여성 제독. 이 네 섬을 요트로 연결하면 그리스의 축소판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로닉 만 7일 루트에서 전체 루트를 확인하고, 앵커링 가이드에서 스페체스 남안의 앵커링 기술을 익힌 뒤 출발하세요.
아침마다 다른 섬에서 눈을 뜨는 여행이 있습니다.
항구에 배를 대고 골목을 걷고, 타베르나에서 생선구이를 먹고,
갑판에서 별을 보며 내일 갈 섬을 고르는 여행.
세일링 비용, 준비 과정, 항해일지, 요트 생활 이야기를 나누는 카페입니다.
요트 경험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궁금한 건 뭐든 물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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