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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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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아해 크루즈 단골 기항지 코르푸의 2400년 전 이야기 2400년 전에 이미 코르퀴라 Corcyra (요즘의 코르푸)는 아드리아해의 강력한 해군 도시국가였다. 번영을 구가하던 이 아름다운 도시국가는 코린트와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 잘 사는 나라이기는 해도 코르푸는 당시 최고의 해군을 가진 코린트의 적수가 되기는 힘들었다. 멸망의 위기에 몰린 이들은 코린트와 앙숙관계인 아테네에 구원을 요청하기로 한다.녹음이 우거지고 바다색이 고운 코르푸는 사람이 살기 좋은 기후와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기원전 5세기 경 그리스는 페르시아와의 두차례 전쟁에서 이겨 에게해의 지배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참조: 2018/09/19 - [나의 샹그릴라! 그리스!/신화와 역사] - [그리스여행 정보] 고대 페르시아의 2차 침공: 아테네 점령 2018/09/18 - [분류 전체보..
흥하는 나라, 망하는 나라 - 아테네의 교훈 요즘 사람들은 최첨단 과학문명의 시대를 산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2천년 정도 전에 살던 사람들은 크로마뇽인이나 네안데르탈인 같은 원시인 정도로 여긴다. 하지만 2천년 전에 살던 사람들보다 현재의 인간은 퇴보했으면 했지 진화하지는 않았다. 몇년 전부터 그리스는 유로존의 골치덩이로 등장했다. 과도한 부채와 방만한 정부의 경제운영때문에 부실에 부실이 쌓여 파산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선진국들의 수혈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그리스는 통합된 유로존을 볼모로 잡고 못된 짓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스 경제위기를 분석한 기사를 읽고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스 연금제도가 너무 방만하게 운영되어 경제파탄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미용사 예를 들었다. 연금에는 위험직종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조기은퇴..
[그리스여행 정보] 고대 페르시아의 2차 침공: 살라미스 해전 자신들의 고향을 유린당한 아테네 인들의 슬픔과 분노는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행동때문에 극한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퇴각 결정.스파르타를 포함한 펠로폰네소스의 그리스 도시국가가 내린 결정을 보고 테미스토클레스는 위험한 모험을 하기로 한다.시키누스 Sicinnus는 페르시아 출신으로 전쟁포로가 되어 테미스토클레스의 노예가 되었다. 아마도 상당한 지식인이었던듯 테미스토클레스는 시키누스를 자기 자식들의 가정교사로 삼았다. 그런 은혜를 입었으니 시키누스의 충성심은 각별할수 밖에 없었다.테미스토클레스는 시키누스에게 편지 한 통을 주어 크세르크세스에게 전하도록 한다. "대왕이시여. 대왕의 뜻에 동조하는 아테네 장수 테미스토클레스가 기밀 정보를 보고합니다. 아테네의 해군은 내분이 일어나 군기가 형편없으며 곧 퇴각할 ..
[그리스여행 정보] 고대 페르시아의 2차 침공: 아테네 점령 크세르크세스의 육군이 테르모필라에에서 스파르타의 왕 레이니다스가 이끄는 300명 결사대에게 혼줄이 나고 있는 동안바다에서 페르시아 해군도 테르마 (지금의 테살로니키)에서 출항하여 항해하던 중 태풍을 만나 3일 만에 400여척의 전함을 포함한 수많은 선박이 침몰하는 피해를 입었다. 페르시아 해군의 피해 소식에 고무된 그리스 해군은 아르테미시움Artemisium에서 해전을 펼친다.막대한 피해를 입기는 했어도 페르시아 해군은 그리스 해군보다 훨씬 많은 전함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리스 해군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피해만 커질뿐 승부가 나지 않았다.그러던 중 테르모필라에가 크세르크세스 손에 떨어졌다는 정보가 전해졌고 전의를 잃은 그리스 해군은 즉시 수니온 곶을 지나 살라미스 섬까지 후퇴하였다. 사태가 이쯤되자 아테네A..
[그리스여행 정보] 고대 페르시아의 2차 침공: 스파르타 테르모필라에 전투 300명의 스파르타 군대를 끌고 레오니다스는 테르모필라에로 출발했다. 가는 도중에 다른 도시들에서 온 병력 약 7000명과 합류하였다. 가소로운 숫자의 그리스 연합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크세르크세스 왕은 사신을 보내 레오니다스에게 그리스 군의 모든 무기를 자신에게 보내라고 했다. "모론 라베!"사신의 말을 들은 레오니다스가 했다는 말이다. 우리 말로는 "와서 가져가라!"는 뜻이다. 작은 도시 스파르타의 기념품 가게에서 산 티셔츠에도 적혀 있는 스파르타 정신을 한마디로 나타내는 상남자의 멘트.또 다른 일화. 스파르타 군사 한 명이 레오니다스에게 적의 군세를 설명하며 "그들이 화살을 쏘면 하늘을 뒤덮어 어두워 질 정도라고 합니다."라고 하자 했다는 레오니다스의 말. "잘 됐네. 그늘에서 싸울 수 있겠구..
[그리스여행 정보] 페르시아의 2차 그리스 침공: 크세르크세스 진군 마라톤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은 귀국하자 곧 바로 복수전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하지만 복수를시작하기도 전에 죽어버리고 아들 크세르크세스 Xerxes가 왕위를 계승한다. 영화 '300'에서 이상한 차림을 한 왕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이 사람. 크세르크세스 왕은 기원전 480년 사르디스를 출발 대군을 이끌고 육로로 진격한다.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헬레스폰트해협을 부교를 건설해 통과한 그는 트라케 Thrace 지방으로 진군하며 계속 병력을 보강했는데 전사만 육군과 해군을 합쳐264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지원 인력까지 포함하면 최소 528만명이 이동했다고 한다. 고대 기록이 10배로 뻥튀기 되었 다 해도 26만의 병력을 동원한 것 조차 당시로는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크세르크세스의 침..
[그리스여행 정보] 고대 페르시아의 1차 그리스 침공: 마라톤 전투 아시아 최강의 제국 페르시아의 심기를 건드린 아테네. 바람 앞에 선 촛불이 된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은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었으므로 싸움은 해보나 마나한 것 처럼 보였다.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군대가 수백척의 전함을 타고 트라케 해안을 따라 아테네를 향해 항해하여 마라톤 평야에 상륙한다.이들의 길잡이는 한 때 아테네의 참주였던 히피아스. 참주는 현대의 독재자에 해당하는데 히피아스는 폭정을 휘두르다 아테네에서 쫒겨났다. 그런 그가 아테네에서 추방당한 보복을 위해 페르시아의 앞잡이가 된 것이다.백만대군이란 말이 있지만 현대 전술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페르시아 육군은 10만 명이었다고 한다.이에 비해 아테네는 주변 지역을 탈탈 털다시피해서 모은 9천명이 전부였다.마라톤 평야는 아테네에서 불과..
[그리스여행 정보] 고대 그리스 식민지 - 북쪽의 코르퀴라, 칼키디케, 비잔티움 등 이오니아 해 Ionian Sea 동쪽 해안에도 그리스 식민지가 개척되었는데 코르퀴라 Corcyra가 가장 번창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코르푸 Corfu라고 부르는 이 섬은 코린트 인에 의해 기원전 700년에 세워졌다. 그리고 머지 않아 코린트와 무역 경쟁자의 위치에 오르게 되어 비극이 잉태된다. 기원전 664년 부터 코린트와 코르퀴라는 해전을 벌이더니 급기야 수십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단이 된 것이다.코르푸의 해안은 아름답기로 유명하고 또 복잡한 해안선 때문에 해적의 소굴이 되기도 하였다.코르퀴라의 부근에 레우카스 Leucas, 아낙토리움 Anactorium, 아폴로니아 Apollonia, 그리고 에피담노스 Epidamnus에도 그리스 식민지가 개발되었다.그리스 동북부, 마케도니아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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