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홍명보 감독에 대한 비난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그 비난이 얼마나 타당한 지는 시간이 지나며 밝혀질 것이다. 다만 이런 세상을 보며 역사를 되짚어 지혜를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무려 2500년 전에도 대중은 쉽게 휘둘리고, 지금도 그런 일이 반복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우니까.
고대 아테네에는 도편추방제(ostracism)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는 위험 인물을 추방하기 위한 민주적 투표 절차였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씁쓸한 뒷 맛을 느끼게 된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매년 한 번, 시민들이 투표를 통해 그 해에 도편추방제를 실시할지 여부를 먼저 결정했다. 보통 1월에서 3월 사이에 열렸던 아고라(Agora)에서 시민들이 모여 이에 대한 표결을 진행했는데 만약 다수가 찬성하면 그 해에 도편추방제를 시행하는 것으로 확정되었고, 이후 추방 대상자를 뽑는 본격적인 절차가 진행되었다.
추방할 인물을 정하는 투표에서 시민들은 *도편(ostrakon)*이라는 작은 도자기 조각에 추방되길 원하는 인물의 이름을 적었는데, 정치적으로 위협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여겨지는 인물이 주로 표를 받았다.
도편에 적힌 이름은 누구든 적을 수 있었으나, 투표 결과가 무효가 되지 않으려면 일정한 참여 요건이 필요했다. 추방이 유효하려면 최소 6,000명의 시민이 투표에 참여해야 했다. 이 숫자는 아테네 성인 남성 시민의 상당수를 의미한다.
투표 결과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인물이 10년 동안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 추방 후 10년이 지나면 그 인물은 특별한 불이익 없이 다시 아테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추방된 동안 재산은 몰수되지 않았고, 가족도 그대로 남아 생활할 수 있었다.
도편추방제는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매우 독특한 제도였으며, 권력의 집중을 방지하고자 하는 아테네 시민들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대중의 여론이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권력자들은 때로 이 도편추방제를 정치적 무기로 사용해 경쟁자를 제거하려 했고, 때로는 시민들이 감정에 휩쓸려 훌륭한 지도자도 추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테네의 명장 밀티아데스와 그의 아들 키몬이다.
밀티아데스는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물리치며 아테네를 구한 영웅이었지만, 이후 그가 주도한 원정이 실패하자 대중은 그를 추방하고 벌금을 부과했으며, 결국 그는 감옥에서 사망하게 된다. 그가 남긴 공적은 금방 잊혀졌고, 실패의 책임을 묻는 여론은 가혹했다.
그의 아들 키몬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라톤 전투나 살라미스 해전 보다도 훨씬 큰 승전을 일궈내 페르시아의 영향력에 치명타를 가한 영웅이었지만 여론의 변화에 따라 그도 도편추방제의 희생양이 되어 추방되고 말았다.
그리스 도편추방제의 사례를 밀티아데스, 키몬에 이어 데미스토클레스와 연결하면, 영웅의 추락과 대중의 변덕이라는 주제가 더 부각된다. 데미스토클레스는 고대 아테네의 가장 위대한 정치인 중 한 명으로, 그가 겪은 도편추방제의 비극은 당시 아테네 정치의 역설을 잘 보여준다.
데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백척간두의 아테네를 구한 영웅으로, 그의 지략과 지도력은 그리스의 역사에서 빛나는 순간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테네의 정치 상황이 변하고, 그의 권력이 점점 커지자 그는 동료 정치인들의 질투와 대중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 결국 데미스토클레스도 도편추방제로 인해 아테네를 떠나야 했고, 그의 추락은 그가 한때 구해낸 도시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데미스토클레스의 추방은 밀티아데스와 키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중이 영웅에게 기대하는 완벽한 성공과 그에 미치지 못했을 때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데미스토클레스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아테네의 수호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의심과 정치적 경쟁에서 패배하여 추방당했다. 이는 대중이 영웅을 추앙할 때와, 그들을 배척할 때의 태도 변화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비극적인 것은 밀티아데스와 키몬 부자는 결국 아테네로 돌아왔지만 데미스토클레스는 망명지를 떠돌다 페르시아 왕의 보호 아래 죽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홍명보 감독의 사례도 이와 유사하다. 그는 선수 시절부터 한국 축구의 상징적인 인물이었고, 지도자로서도 큰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브라질 월드컵의 부진한 성적 이후 그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그동안 쌓아온 명성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축구팬들과 언론의 신랄한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그는 한때의 영광을 뒤로하고 결국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다.
고대 아테네에서 추방해버린 영웅들에 비하면 홍명보 감독이 받은 존경과 사랑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구의 업적이 크고 작고를 떠나 같은 인물에 대한 평가가 짧은 기간에 극단적으로 변하는 것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도편추방제에 의연하게 대처한 일화 한가지.
아리스티데스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특히 그의 정직성과 공정함으로 인해 "정의로운 아리스티데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경력도 도편추방제를 피하지 못한 또 하나의 사례로, 대중의 변덕스러운 본성과 도편추방제의 정치적 역학을 잘 보여준다.
아리스티데스는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에도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를 이끈 중요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정의롭고 공정한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동료 정치가들 사이에서도 명성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정치 내에서 경쟁자들이 있었고, 대중 사이에서 그의 명성이 점차 권력 남용으로 비춰지기 시작했다.
아리스티데스가 추방되는 투표 날, 투표장으로 가는 그에게 글을 모르는 아테네 시민이 도편에 이름을 적는 것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 시민은 아리스티데스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사람들이 그를 지나치게 칭송하는 것이 싫어 그의 이름을 적고 싶다고 했다. 아리스티데스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그 요청을 들어주었다고 전해진다. 아리스티데스의 인물 됨됨이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일자무식의 아테네 시민같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부화뇌동하는 인간들이 바글바글 한 것이 아니면 좋겠다.
'살자니 고생, 죽자니 청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에서 유독 심한 세대간 갈등: 다른 나라와 비교 (4) | 2024.09.10 |
---|---|
한국 내 사회 갈등의 근원: 너무 빠른 경제발전? (2) | 2024.09.09 |
미국 신용등급 하향: 피치의 용기, 미국의 행패 (1) | 2023.08.03 |
경제위기는 진행 중: 침몰 중인 대한민국 경제 (2) | 2022.10.21 |
주택담보대출: 미국엔 벌써 경보가 울리는데, (0) | 2022.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