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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샹그릴라! 그리스!/신화와 역사

[그리스여행 정보] 스파르타 시민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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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는 기원전 14세기 경 도리아인이 유럽의 북쪽에서 침입, 점령하고 지배했다. 그 과정에서 스파르타에 사는 사람은 세 계급으로 나뉘어졌다. 

제1계급인 시민은 '호모로이'라고 부르는데 참정권과 피선거권을 갖는 계급이다. 모두 군인으로 60세까지 복무하였다.  

제2계급은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의 '페리오이코스'라고 불리는 계급으로 땅도 소유할 수 있고 군대에도 참여하여 육군에서 홉라이트 hoplites, 해군에선 에피바스테스 epibastes로 복무하기도 하였다. 상당한 자유를 누린 이 계급은 몰락한 도리아 족이나 도리아 인에게 크게 저항하지 않은 아카이아 인으로 구성되었다.

제3계급은 헬리오테스 또는 헬로이타이 Helots 계급이다. 이들은 노예 계급으로 스파르타 경제를 유지하는 농장등에서 일하는 계급이다. 스파르타 주변의 넓은 농장지역에 흩어져 살고 숫자는 시민 계급을 압도하게 되어 여러차례 봉기를 일으키는등 시민계급에게는 골치거리였다.


7살부터 공립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시민계급의 소년은 십대가 되면 후배들을 지도하면서 자신은 군인으로서 훈련을 계속한다. 20세 전후에 첫 참전을 하게 되면 전통에 따라 이들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방패를 선물하는데 항상 "이 방패를 들고 돌아오든지 아니면 타고 오너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전사자를 반드시 수습했었다. 명예롭게 전투에서 죽으면 설령 전투에서 패했더라도 동료들이 시신을 찾아 그의 방패에 실어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스파르타 시민들은 지배계급이면서도 어떤 호사도 누리지 않았다. 그들의 식사는 언제나 한가지, 돼지 피를 넣고 끓인 '검은 죽'이었다고 한다. 어떤 맛도 느낄 수 없는 지독한 음식을 평생 15명의 동료들과 같이 먹는 이유는 단 하나. 평시에도 전투에서와 같은 최악의 상태를 견지하고 훈련하는 것. 


아내와 식사는 일주일에 한번도 허락되지 않았던 것 같다. 오죽하면 스파르타 쇠락의 이유 중 하나가 낮은 출산율로 인한 인구 감소였으니 할 말이 없다. 환갑이 되도록 이렇게 남자들끼리 생활하고 전쟁을 하고 살았다. 과연 인간이 이런 삶을 스스로 받아들였다는 것이 믿기 어려울 지경이다. 


어떤 게으름이나 럭셔리도 없이 일곱살 부터 환갑까지 국가의 도구로 철저히 봉사하는 스파르타 시민계급의 인내심과 자제력은 그들의 전공에 그대로 드러난다.

마라톤에서 대패한 페르시아는 십여년의 절치부심 노력 끝에 기원전 480년 대규모 육군과 해군을 이끌고 그리스에 쳐들어 와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벌인다. 약 15만명의 페르시아 육군은 아테네를 향해 진군했는데 레오니다스 왕이 지휘하는 300명의 스파르타 군대 포함 1400명이 '테르모퓔라에'Thermopylae에서 모두 전사할 때까지 사흘간 페르시아의 공격을 저지했다.


바닷가의 테르모필라에를 방어하는 스파르타 군. 

스파르타 전사자들을 기리는 동상이 지키고 있다.



전투가 있던 곳의 오늘 모습. 오른쪽으로 바다가 가깝다. 


그리스의 대부분 도시는 산꼭대기에 방어 성채를 갖고 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코린트의 아크로코린트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스파르타에는 그런 것이 없다. 대체 누가 스파르타를 공격한단 말인가?

그래서 스파르타는 분지에 성벽도 없이 그저 평범한 마을처럼 자리잡고 있다.



스파르타 티셔츠에 새겨진 그림에도 테르모필라에 전투가 등장한다. 

"모론 라베"라고 써있다. 사연은 이렇다.

레오니다스 왕 휘하의 스파르타군 300명과 동맹군 천명 정도가 지키는 테르모필라에에 도착한 페르시아 왕이 항복을 권유하는 뜻으로 사신을 보내 "너희들의 무기를 다 내놓아라."라고 요구했다. 레오니다스는 "모론 라베"라고 대꾸 했다고 한다. 뜻은 "와서 가져가라."라고...  스파르타인들의 패기가 느껴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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