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4월 14일 레닌이 오랜 망명생활을 접고 취리히를 떠나 러시아의 페트로그라드로 돌아갔다.
그의 귀환은 독일의 후원으로 가능했는데 독일의 소위 '혁명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것은 일차대전 동안 연합국 편을 든 제정 러시아를 붕괴시키는 전략이었다.
혁명은 레닌에게 종교였다. 그리고 그의 삶은 폭력적이기는 하지만 종교적 맹신에서 나오는 폭력성과 많이 닮아 있었다. 어떤 이는 레닌의 극단적인 독선과 불관용, 청교도적 태도가 칼뱅과 흡사하다고도 할 정도였다. 그는 수도사처럼 세상의 실제와 격리된 삶을 살며 공산당의 전제군주로 군림했다. 레닌의 혁명은 여러 면에서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프로레탈리아 혁명과 판이하게 달랐다.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책임자로 오래 일했던 레닌의 심복 트로츠키는 "당은 당의 기구가 대신했고, 당의 기구는 중앙위원회가 대신했으며, 중앙위원회는 마침내 독재자 한 사람이 대신했다."고 적고 있다. 레닌 자신도 "계급은 당이 지도하고, 당은 지도자라고 불리는 개인이 지도한다."라고 하며 일인 독재를 당연시 했다.
레닌의 극단적인 독선은 러시아 혁명이 성공을 거둔 후에 벌어진 당내 숙청에서 잘 드러난다. 레닌은 이론가라기 보다는 행동가, 그것도 지나친 행동가였다. 1917년 당시 마르크스 주의자는 독일인이었고 그들은 프로레타리아의 승리가 다윈식 진화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급진적인 레닌에게 그런 답답한 진화과정을 기다리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는 혁명에는 선진화된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혁명과 초기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혁명 두가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선진화된 국가에선 성숙한 노동자 조직이 혁명을 일으키는 반면, 러시아와 같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혁명가 조직'이 혁명을 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레닌의 생각은 멀리 떨어진 또다른 후진국 이태리의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이식되어 파시즘을 낳았다. 레닌과 무솔리니는 모두 혁명에 폭력이 불가피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외에도 두사람은 다섯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1. 교조주의에 집착하고 어떤 개량주의도 배격한다.
2. 당은 집중화되어야 하고 엄격한 위계가 필요하다.
3. 혁명은 직업혁명가가 주도해야한다.
4. 프로레탈리아는 자신을 조직화할 능력이 없다.
5. 대중에게 혁명의식을 주입하는 것은 엘리트 혁명가의 역할이다.
독일에서 시작된 마르크스 주의의 이념은 이렇게 러시아에서 레닌에 의한 일당독재의 공산주의로 발전하였고, 이태리에서는 무솔리니에 의해 폭력에 호소하는 파시즘으로 악의 꽃을 피워내었다.
사실 러시아 혁명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멘셰비키 쪽에 있었다. 볼셰비키는 레닌이 스스로 지배할 수 있는 지식인들만의 소규모 조직이었다. 볼셰비키 엘리트 중에 농민출신, 숙련된 노동자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런 폐쇄적이고 완고한 엘리트 주의 때문에 미국에서 돌아 온 트로츠키와 힘을 합쳐 레닌이 일구어 낸 것은 2만명의 지지 세력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1억6천만의 인구를 가진 러시아에서 너무나 작은 집단이었다.
소수파에 불과한 볼셰비키가 농민의 지지를 얻게 된 것은 레닌이 전쟁에 반대하는 정책을 지지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농민은 전쟁물자로서의 식량을 착취당하느라 피폐해질대로 피폐한 상태였다. 그런 불만은 반란으로 이어져 혁명의 전 해인 1916년에는 557차례의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레닌과 농민세력의 연합은 볼셰비키에게 획기적인 기회를 제공하였고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레닌은 직접적인 일당독재를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노동자 위원회' 즉 러시아어 '소비에트'를 통한 생활개선을 원하고 있었다. 마르크스 주의가 주장하는 프로레탈리아 독재는 소비에트와 공존할 수 없지만 레닌은 소비에트를 장악한 후 그것을 프로레타리아 독재기구로 이용할 계략을 꾸몄다.
소비에트 운동이 확산되어 1917년 6월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리고 833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이때 농민대표는 285명, 노동조합 대표인 멘셰비키 248명, 볼셰비키 105명, 무소속 45명 등 이었다. 볼셰비키와 무정부주의자 들은 같은 해 7월에 봉기를 일으켜 주도권을 잡으려다 실패했고 레닌은 핀란드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레닌의 핀란드 망명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같은 해 10월 9일 페트로그라드로 잠입해 중앙위원회 회의를 주재하면서 무장봉기를 결의했다. 또 무장봉기를 책임지는 '정치국'을 신설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트로츠키가 지휘하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하부의 '군사혁명위원회'가 준비를 도맡았다.
무장봉기는 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리는 10월 25일에 일어났는데 무력충돌도 없이 싱거운 성공으로 끝이났다. 대회는 3가지 법안을 통과시키며 권력 이양을 승인하고 끝이나고 이제 권력은 모두 '군사혁명위원회'로 집중되었다. 통과된 세가지 법령은 전쟁중단, 토지소유권 폐지, 인민위원회 설치에 관한 것이었다. 이 혁명은 종래의 쿠데타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으며 독일인들은 그저 '폭동'이라고 폄하했다.
권력 탈취에 성공한 레닌은 곧 바로 언론을 관리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정부에 대한 공개적인 저항이나 불복종을 호소하는 신문이나 명백한 중상과 비방의 의도로 사실을 왜곡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신문"은 모두 폐간되었다. 남은 언론은 볼셰비키의 기관지 '프라우다'와 소비에트의 기관지 '이즈베스티야' 뿐이었다.
언론 통제를 마친 레닌은 러시아의 사유재산을 모두 국가에 귀속시켰는데 12월 29일에는 모든 이자와 배당금 지급이 중지되고 예금인출은 엄격히 제한되었다.
볼셰비키의 군대는 트로츠키가 장악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국사혁명위원회였다. 이 위원회는 10월 25일 거사가 성공한 직후 '중앙집행위원회'의 하부위원회가 되었고 반혁명행위에 대한 처벌을 포함한 안보업무를 담당했다. 인민위원회는 같은 해 12월 7일 군사혁명위원회를 해체하는 법을 통과시키면서 하나의 특별부서는 '전 러시아비상위원회 (Cheka)'라는 이름으로 존속시켰다.
체카는 인민에 대한 테러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차르 시대 말기에는 한 해 평균 17명을 사형시켰지만 체카는 한 달에 천명을 처형했다. 체카는 체포하고 심리하고 선고하며 처벌까지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견제도 없이 의심이 간다는 이유만으로 사형을 집행할 수가 있었다. 실제로 체카는 레닌이 러시아에서 '해충'을 박멸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해충으로 분류된 전 지방의회의원, 주택소유자, 고등학교교사, 성가대원, 성직자, 수도사와 수녀, 톨스토이적 평화주의자, 노동조합간부 등의 계급을 탄압하는 폭력기구가 되었다. 집단학살의 개념은 이때 탄생한 것이다.
프로레타리아의 승리를 앞당기기 위해 엘리트에 의해 주도된 혁명이 성공한 후 기대와는 반대로 국유화된 러시아 산업은 급격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페트로그라드의 인구는 1917년 겨울이 지나자 240만에서 150만으로 줄었고 모스크바에서도 44.5%의 인구가 도시를 버렸다. 1920년이 되자 제조업 총 생산은 전쟁 전의 12.9%에 불과했다. 레닌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 프로레타리아를 대신해 전위엘리트가 혁명을 주도한 것 처럼 '모든 생산요소'를 운영하는 것도 전위엘리트가 프로레타리아을 대신해야 한다고 믿었고 철저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도시에 식량을 공급하지 못하게 된 1921년 5월 레닌은 체제 붕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신경제정책'을 내세우며 물물교환에 기초한 시장경제로 회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1-22년 겨울동안 300만명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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