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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타임스1 digest]1차 세계대전과 민족자결주의 그리고 베르사이유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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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1차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에 동유럽 및 중부유럽의 25% 지역에는 다양한 민족이 뒤섞여 살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도 다양한 인종이 뒤섞인 넓은 영토 때문에 민족주의를 토대로 평화를 이루려는 생각이 없었다. 

전쟁 중에도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비밀조약들을 체결하여 다른 민족이 점유하는 땅을 나눠가졌었다. 프랑스는 1917년 3월 11일 러시아와의 비밀조약에서 러시아의 폴란드 접수와 프랑스의 라인란트 수용을 양해하기로 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1916년 체결된 비밀 조약 사이크스-피코협정에서 터키의 아랍영토를 떼어내 나눠갖기로 하였다. 이태리는 1915년 런던비밀조약에서 티롤, 달마시아의 지배권을 넘겨받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 왕정이 무너지고 합스부르크가 단독강화를 거부하자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방침을 택해 '민족자결주의'를 전쟁의 목적으로 선언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는 러시아를 장악하고 난 후, 모든 민족에게 자결권을 약속하며 유럽전역에 공산혁명을 부추겼다. 

볼셰비키의 민족자결주의 선전에 자극받은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영국, 프랑스와 상의도 없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입각한 23개의 강화 조건을 발표했다. 

윌슨은 파리에서 열리는 종전협정에 참석함으로써 회담을 좌우하는 최고 실력자의 지위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총리급 인사로 전락해 협상을 미궁에 빠뜨렸다. 

협상에 임하는 프랑스의 태도는 특히 강경해서 독일을 '자신의 사형집행명령서에 본인이 직접 서명을 하라는 식'으로 압박하였다. 영국은 가혹한 전쟁 보상이 또다른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두려워 중재를 하려했으나 미국과 프랑스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럼에도 프랑스 국민 대부분은 클레망소가 협상에서 너무 많은 것을 양보했다고 믿었다. 미국도 젊은 세대에서 베르사유조약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두드러졌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이 조약에 가장 통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의 주장은 1차대전의 상처를 극복하는데 쓰일 수도 있었지만 무시당했고 결국 2차 세계대전의 종전후 치유책으로 채택되었다. "마셜플랜"의 이름을 갖고서

윌슨은 국제연맹 창립 욕심에 사로잡혀 경제 부흥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채무국이었다. 전승국은 미국에 빚을 갚기 위해 독일로부터 받는 배상금에 극단적으로 의존했다. 그러나 독일은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고 1922년 12월 26일 베르사유조약에 의거 채무 불이행 국가로 선고받았다. 그 결과 프랑스는 라인강을 넘어 루르 지방을 점령했다. 독일 경제는 붕괴해 1913년 100이던 소매물가지수가 십년뒤 161억7천만이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인종민족주의의 산물이었다. 민족간 언어적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며 여러민족이 공존하는 정체를 위태롭게한 인종민족주의는 1919년 모든 젊은이에게 상식처럼 여겨졌다. 민족주의자들은 유럽을 갈갈이 찢어놓았다. 1919-22년 사이에 유럽에서는 20회 이상의 소규모 전쟁이 벌어졌다. 

인종민족주의에서 가장 큰 덕을 본건 폴란드였다. 1921년 3년간의 싸움이 끝났을 때 폴란드는 평화회의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두배나 큰 영토를 가진 국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러시아를 제외하고 유럽에서 가장 심각한 소수민족 문제에 직면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인이 지배하고 있는 소수민족 집합체였다. 체코인이 슬로바키아인, 독일인, 마자르인, 루테니아인을 핍박하고 있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유사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보다 심했다. 동방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이 군대와 행정부를 차지하고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과 슬로베니아 인을 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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