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만티네아에서 정남향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북쪽에서 접근하는 길은 산들을 넘어야 한다.
스파르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자연 방벽이라고 할 엄청난 산들이다.
산 속에 묻힌 농업국가가 스파르타 였다. 그들은 일단 터를 잡고 나서는 다른 나라를 정복하는데 열성적이지 않았다. 수많은 식민지를 개척한 아테네와는 대조적이다.
성벽에 가까이 다가가 스파르타 장갑 보병의 눈으로 주위의 산 마루를 살펴본다.
펠로폰네소스 북부에서 접근하는 길은 살짝 내리막인 길과 평지를 달리다 바로 스파르타 도심을 관통한다. 편도 2차선인 도로는 가로수가 심어진 화단이 중앙선을 대신한다.
평범한 지방의 소도시. 이 조용한 마을이 스파르타이다.
역사
스파르타는 그리스 고대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스파르타는 기원전 1200년 경부터 도리아 인들이 살던 곳이고 그전에는 아카이아 인이, 또 그 전에는 펠라스고이가 살던 땅이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숙적으로 삼십년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이겨 전 그리스를 지배하기도 했다.
스파르타는 그리스 도시국가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나라였다. 그 이유는 일찌감치 주변의 비옥한 평야지대를 모두 정복해 그것을 지키는 것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피정복민을 국가 노예로 삼아 모든 경제활동을 맏기고, 스파르타 시민은 모두 7살부터 60살까지 직업군인으로 살았다. 시민의 대여섯배에 달하는 노예, 헬로이타이를 부리고, 체제를 유지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크세노폰은 “헬로이타이는 기회만 있으면 스파르타 시민을 산 채로 잡아먹으려고 한다.”고 할 정도였다.
그리스에서 직업군인을 가진 도시국가는 스파르타 뿐이었다. 아테네를 비롯한 모든 나라는 농민이 창들고 나서면 군인이 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 보니 스파르타는 무적이었고 많은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페르시아 전쟁때, 수십만의 군사를 몰고 온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는 천 여명의 군대로 방어하는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에게 전령을 보낸다. 메세지는 “그리스 군의 무기를 모두 제출하라!”
스파르타 왕의 대답은 “모론 라베 ΜΟΛΩΝ ΛΑΒΕ!”
“와서 가져가라고 전해라!”였다. 그리고 왕을 포함한 스파르타 군인 300명이 모두 전사할 때까지 수 십만을 상대로 며칠동안 버텨냈다. 그들이 전사한 곳에는 “나그네여, 스파르타에 들르거든 우리가 스파르타의 법에 따라 이곳을 지키다 죽었다고 전해 주시오.”라고 쓴 묘비가 서있었다. 스파르타의 법은 결코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레오니다스의 동상이 스파르타 유적 앞에 있는데 기반석에 모론라베라고 써있다.
스파르타의 여인들 역시 만만치 않았는데 17세가 되어 첫 출전을 하는 아들의 방패는 어머니가 만들어 주며 “이 방패를 들고 돌아 오던가, 타고 오너라!”라고 말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 말은 살아서 오던가 죽더라도 명예롭게 죽어 전우들이 시신을 거두어 오게 하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스파르타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무적의 군대가 아니다. 그것은 바라 스파르타 시민들의 믿기 어려운 참을성이다. 일곱살 때부터 60살까지 군 생활을 하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엄청난 노예를 거느린 시민들의 삶은 호화로움과 무관하다. 7살에 군대에 가면 얇은 옷을 한 벌 받아 일년 내내 입었으며, 침대 대신 강가의 갈대를 꺽어다 잠자리를 만들었다. 심지어 매년 신전에 가 며칠씩 두들겨 맞기 훈련을 해야 했다. 식사는 평생을 15명 정도의 군 동료들과 함께 해야 했는데 한번의 예외도 없이 동물 피를 섞어 만든 검은 죽을 마셨다고 한다. 한 사신이 이 음식을 먹어보고 “왜 스파르타인이 죽음을 두려워않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유적
스파르타 시는 고대 스파르타에 있어 유적까지 호텔에서 걸어서 10여 분이면 도착한다.
도시 중앙로의 끝에 레오니다스 왕의 동상이 있고, 그 뒤로는 운동장이 넓게 자리하고 있어, 고대 스파르타인들이 체육을 중시한 전통을 느낄 수 있다.
운동장을 오른편에 두고 난 길을 따라 걸으면 유적으로 이어진다.
대략 5-6분을 걸어 들어가면 느닷없는 공터에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 표지판이 나타난다.
무시무시한 산 꼭대기의 삼엄한 성벽에 둘러싸인 아테네와 코린트의 아크로폴리스에 비하면 이곳은 평지에, 변변한 벽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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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 성벽이라고 할 만한 것도 조금만 남았다. 역사다리꼴의 커다란 창문이 독특하다. 침략을 많이 당한 곳이라면 저렇게 성벽에 창을 크게 뚫지 않는다.
공격당한 적이 없는 스파르타 본토.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아테네 군이 딱 한번 병풍처럼 펼쳐진 산을 넘어 왔는데, 생전 처음있는 적 출현에 놀란 스파르타 여인들이 남자들을 닥달해 다급하게 평화조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초병이 내다 보았을 풍경을 상상해 본다. 발치에는 가시 덩쿨이 무시무시하다.
다른 방향에 남은 성벽의 모습. 이곳도 멀리 험준한 산이 가로막고 있다.
유적 곳곳은 아직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수천년된 돌담은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고, 그 위로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올리브 나무 등걸이 기괴하다.
멀리 아무도 넘지 못한다는 스파르타를 둘러 싼 산들이 보이고, 올리브 나무엔 발굴 텐트를 지지하는 밧줄을 묶어 놓았다.
파헤친 유적은 옛 가옥의 구조가 뚜렷하다. 방과 복도, 그리고 골목이 수천년 전에 살던 위대한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곳곳에 자라는 아름드리 올리브 나무들은 라오콘의 고통에 찬 얼굴을 하고 있어, 옆에 있는 사라진 영광, 죽어 간 고대 사람들의 흔적을 더 쓸쓸하게 만든다.
가정집이 모여있던 마을의 모습일까? 복잡하게 얽힌 방들의 모습.
만여명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극장은 무대 근처 백여개 좌석의 흔적만이 남았다.
극장의 옆면으로 가면 극장내부로 들어가는 작은 길이 있다.
돌을 깍아 만든 의자는 많은 훼손의 흔적 속에 의연하다.
극장의 무대는 다 무너져 벽채만 뎅그러니 남아있다.
담 위에 서면 나의 그림자가 무대 아래서 판토마임을 펼친다.
무대 주변에 어지러이 널려있는 기둥과 벽을 만들 때 사용된 석재들.
어디로 가는 것인가. 잘 보존된 계단도 있다.
아침의 유적에는 어딘가에 쓰였던 석재들이 용도를 잊은 채, 제법 넓은 공간을 채우고, 돌 틈에는 풀 잎들이 햇살을 받아 푸르름을 뽐낸다.
스파르타의 핵심전력은 중장갑 보병이었다. 그들이 입었을 장갑을 두른 자라 한마리가 유적을 순찰 중이다.
사람은 나이들면 검버섯이 피부에 나오는데 석재는 흰버섯이 올라온다. 2천년의 풍상이 남긴 자국때문에 돌은 손으로도 푸석푸석 부서진다.
스파르타 시내에서 평야를 가로질러 삼십여분을 달리면 험준한 산을 등지고 작은 마을에 도착한다. 중세 마을 미스트라 Mystras.
그리스 사람들은 스파르타 보다 이 중세의 기독교 유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산 아래 스파르타가 조용히 숨죽이는 오후. 삼천년 전을 더듬는 이에게 삼백년 전 이야기는 감흥이 약하다.
붐비는 식당의 저녁. 풍성한 그리스 요리와 알파 맥주 한 잔으로 낮의 열기를 식히면, 내일을 향한 의욕이 충전된다.
그리스의 뜨거운 여름은 선선한 저녁 시간이 있어 견딜만 하다.
용맹의 상징, 레오니다스 동상 앞에서 젊은 연인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스파르타의 위대한 정신은 언제나 처럼 과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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