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개전 후 독일은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프랑스 격파한 것은 불가사의하기 까지 하다. 아래 표에 양국의 군사력을 보면 더욱 독일의 승리가 믿기지 않는다.
독일 | 프랑스 | |
병력 | 250만 | 500만 |
전차 | 2400대 | 3500대 |
야포 | 7500문 | 10200문 |
차량 | 120000대 | 300000대 |
전투기 | 1200대 | 1100대 |
폭격기 | 1700대 | 1000대 |
한마디로 공군력은 독일이 앞서있었지만 육군은 압도적으로 프랑스의 우위였다. 그런데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채 마지노 선 만 믿다가 프랑스는 패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독일은 프랑스 점령 후 영국을 공격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바다 너머의 영국을 점령하는 것은 히틀러의 생각처럼 빨리 진행되지 않았다. 영국은 미국과 소련이 참전하여 독일을 압박해 주기를 기다리면서 버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서 히틀러는 영국의 희망을 꺽어 버리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하고 유럽 대륙에서의 승기를 몰아 소련을 치기로 한 것이다.
독일과 소련의 전쟁은 누가봐도 독일의 낙승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근대화된 강력한 프랑스 군 마저 전격전의 처참한 희생물이 되고 말았는데 전 근대적이라고 알려진 소련 군대는 독일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미국 웨스트포인트 교관들도 독일의 낙승을 예측했다.
이 전쟁은 군사이론적 상식이 작동하지 않는 비합리적인 전쟁이었기 때문에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히틀러는 이 전쟁을 '인종청소전쟁'으로 규정함으로써 객관적으로 전력을 비교하는데 실패했다. 실제로 소련 침공 계획 단계부터 독일군 내부에서는 무리한 전쟁이란 의견이 있었다. 당시 독일군이 동원할 수 있는 것은 120개 사단이었는데 소련침공을 성공시키려면 180개 사단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리고 180개 사단을 동원해도 180km 마다 전차 1대를 배치하는 수준이었다. 서부전선에서 승리할 때는 45km마다 한 대 였다. 항공기 한 대가 커버해야하는 면적도 서부전선의 30 평방킬로미터 보다 두배나 넓은 60 평방 킬로미터였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군 수뇌부 전체회의에서 독일 침공에 반대하는 자는 없었다. '인종청소전쟁' 또는 게르만 민족의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는 전쟁이라는 주장만이 울려퍼졌다.
한편 소련군은 근대화, 민주화된 유럽 군대와 무척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공산주의 정치국 요원들은 퇴각을 명령하는 지휘관을 처형하는 것은 물론 전장에서 후퇴하는 소련 병사들을 즉결처분으로 총살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 상황은 어차피 죽을 목숨, 독일군과 싸우다 죽는다는 의외의 사기진작 효과를 내기도 했다.
허진 저- 바르바로싸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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