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있다는 건 끝을 전제한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과 동경하던 신화의 현장을 보는 기대로 부풀었던 마음은 이제 조금씩 차분히 머리 속 추억으로 바뀌어 간다. 등지고 왔던 석양을 이제 마주 보며 간다.
아침에 늦장을 부린다. 오늘은 기항지에 들르지 않는 sea day. 그동안의 바쁘다면 바쁜 매일의 기항지 여행에서 한숨 돌릴 수 있는 날이다.
유럽여행 가이드이 게으름 피는 동안 M은 발코니에서 독서 중이다. 바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호수와 같다.
점심을 먹고 sun deck에서 놀았는데 M이 내가 마실 걸 가져오는 것을 기다리고 계시다. 잔디밭엔 일광욕하는 사람들. 이곳이 배 위인지, 어느 바닷가 리조트인지 구별할 수 없다.
자유롭다는 것.
난 맨발로 웃통까지 벗고 돌아다녔다. 우리나라 같으면 체면때문에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도 이곳에서는 남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 한 주춤거릴 필요가 없어 더 자유로움을 느낀다. 바에서 산 마실 것을 들고 나의 여인에게로 가는 중.
잔디밭이나 수영장으로 피크닉갈 때 들고 다니기도 하고, 기항지 해변에 갈 때는 비치 타올을 넣어 다니던 가방. 그리고 그 옆에 내가 벗어 놓은 운동화가 어우러져 한가한 휴가의 한 떄를 추억하게 하는 사진이다.
Leffe 한 잔 마시고 잔디밭에 누웠다. 학구파 M은 독서를 계속하고 난 하늘과 바다와 바람에 넋을 맡기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길에 도서관에서 사진을 한 컷 찍는다. 문득 무심코 지나치던 이곳들이 그리워질 날이 있을 것을 예감하면서...
화려한 메뉴와 웨이터들의 performance까지 흥겨운 full course 저녁을 먹고 다시 sunset bar에 왔다. 우리 뒤로 다정한 커플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행복한 휴가의 막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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