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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장소/신화와 역사 (Myth & Place)

밀티아데스는 누구인가?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아테네 장군

by 유럽탐험 2019.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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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티아데스는 누구인가?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아테네 장군

tourinfo.org · 고대 그리스 역사 깊이 읽기

밀티아데스(Miltiades, 약 BC 550~489)는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의 승리를 이끈 장군입니다. 당시 아테네는 페르시아 제국의 침공을 받았지만,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군의 전술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이용해 수적으로 불리했던 그리스군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영웅의 성공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라톤 승리 불과 1년 뒤 파로스 원정에 실패해 재판을 받고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며, 부상이 악화되어 죽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밀티아데스가 누구였는지부터 마라톤 전투의 전략, 승리 이후 몰락까지 살펴봅니다.

항목 내용
이름 밀티아데스(Miltiades)
생몰 약 BC 550~489
도시국가 아테네
신분 장군·정치가
대표 전투 마라톤 전투 (BC 490)
상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아들 키몬(Cimon) — 아테네의 유명 정치가·장군
최후 파로스 원정 실패 후 벌금형, 부상 악화로 감옥에서 사망
밀티아데스 —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아테네 장군

밀티아데스는 누구인가?

밀티아데스는 아테네의 유력 귀족 가문 출신입니다. 기원전 550년경, 올림픽 전차 경주에서 세 번이나 우승한 챔피언 키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아테네에서 손꼽히는 명문이었지만, 당시 아테네는 민주정이 붕괴되고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독재자)로 지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밀티아데스의 삶은 세 단계로 나뉩니다. 첫째, 케르소네소스(현재 갈리폴리 반도)의 참주로서 에게해 동쪽에서 권력을 행사한 시기. 둘째, 페르시아 제국의 신하로 복무하면서 페르시아의 군사 전략을 직접 경험한 시기. 셋째, 아테네로 돌아와 장군이 되어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끈 시기입니다.

이 독특한 이력 — 특히 페르시아 제국 안에서의 경험 — 이 마라톤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밀티아데스와 마라톤 전투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대함대를 동원해 그리스를 침공했습니다. 아테네에서 추방당한 옛 참주 히피아스가 페르시아군의 길잡이 역할을 하며 마라톤 해변에 상륙했습니다.

아테네는 위기에 빠졌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싸워야 할지 장군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렸습니다. 이때 페르시아의 전략에 통달한 밀티아데스가 마라톤에서 싸워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는 장군들의 리더인 칼리마커스를 설득했고, 아테네군은 마라톤 평원으로 향했습니다.

마라톤 전투 — 밀티아데스의 승리

결과는 역사를 바꾼 승리였습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아테네군이 페르시아 대군을 격파했습니다. 아테네 전사자 192명에 비해 페르시아 측은 6,400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헤로도토스는 기록합니다.

역사 속 아이러니 — 히피아스는 밀티아데스를 행정관으로 임명했던 아테네의 참주였으나, 이제는 페르시아의 앞잡이가 되어 마라톤 해변에 초라하게 등장했습니다. 한편 밀티아데스는 마라톤 전투의 승자로 영광을 차지했습니다. 히피아스는 마라톤 전투에서는 살아남았으나 페르시아로 돌아가는 도중 렘노스에서 한 많은 망명객의 생을 마감합니다.

밀티아데스는 어떻게 페르시아군을 이겼나?

밀티아데스의 마라톤 전술은 고대 전쟁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입니다. 핵심은 페르시아군의 전투 방식을 역이용한 것이었습니다.

밀티아데스의 마라톤 전술

① 양쪽 날개를 강하게 배치

밀티아데스는 그리스 중장보병(호플리테스)을 양 날개에 집중 배치했습니다.

② 중앙을 상대적으로 얇게 구성

중앙 전열을 의도적으로 얇게 만들어 페르시아군이 전진하도록 유도했습니다.

③ 페르시아군 중앙이 전진

예상대로 페르시아군의 정예 부대가 중앙에서 그리스군을 밀어붙였습니다.

④ 그리스군 양익이 페르시아 양쪽을 격파

강화된 양 날개가 페르시아 양쪽 부대를 무너뜨렸습니다.

⑤ 양익이 방향을 돌려 페르시아 중앙을 포위 공격

양쪽에서 승리한 그리스군이 안쪽으로 돌아 페르시아 중앙을 양면에서 압박했습니다.

⑥ 페르시아군이 해안의 함선으로 후퇴

포위된 페르시아군은 무너졌고, 해변의 배를 향해 패주했습니다.

이 전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밀티아데스가 페르시아군의 전투 방식을 직접 경험하며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군은 중앙에 정예 부대를 배치하고 양쪽은 상대적으로 약한 편성을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밀티아데스는 정확히 이 약점을 겨냥했습니다.

마라톤 전투가 실제로 벌어진 해변과 밀티아데스 동상, 아테네 전사자 192명의 무덤을 직접 방문한 기록은 「마라톤 전투 현장을 걷다」에서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밀티아데스가 페르시아를 잘 알았던 이유

밀티아데스가 페르시아 전술에 통달하게 된 배경은 그의 독특한 이력에 있습니다.

기원전 513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트라키아를 침략했습니다.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케르소네소스를 점령한 페르시아는 밀티아데스를 제국의 신하로 임명하고 스키타이족과의 전쟁에 동원했습니다.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군과 함께 행군하면서 그들의 편제, 전투 방식, 지휘 체계를 직접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인 신하들을 남겨둔 채 다뉴브강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 진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밀티아데스는 남아있던 그리스인들을 설득해 다리를 파괴하고 다리우스를 죽이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그리스인들은 반대했고, 돌아온 다리우스에게 밀티아데스의 음모를 밀고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의 적이 되었지만, 동시에 페르시아군의 내부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리스인이 되었습니다. 이 지식이 20여 년 뒤 마라톤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합니다.

케르소네소스의 참주였던 밀티아데스

밀티아데스의 형 스테사고라스는 친척이 세운 트라키아의 식민도시 케르소네소스(현재의 갈리폴리 반도)에서 참주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514년, 스테사고라스는 정치적 혼란 중에 머리에 도끼를 맞고 죽었습니다.

케르소네소스 위치 — 현재의 갈리폴리 반도

아테네의 참주 히피아스는 동생 밀티아데스를 보내 케르소네소스의 참주가 되도록 명했습니다. 밀티아데스 시절의 케르소네소스 금화에는 왼 발을 든 사자 또는 아테나의 두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밀티아데스 시절 케르소네소스 금화

아테네로 돌아와 장군이 되다

페르시아의 추격을 피해 도망한 밀티아데스는 기원전 499년 이오니아 반란에 참가했고, 케르소네소스로 돌아가 렘노스 등 섬을 점령해 아테네에 바침으로써 아테네와의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이오니아 반란은 기원전 494년 그리스 도시들의 패배로 끝났고, 또다시 페르시아에 잡힐 위기에 처한 밀티아데스는 기원전 492년, 가족과 배 다섯 척에 나누어 타고 아테네로 피신합니다.

그가 돌아온 아테네는 이미 15년 전에 민주정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참주 히피아스 밑에서 행정관을 지냈고 케르소네소스에서는 스스로 참주를 지낸 밀티아데스를 아테네 시민들이 탐탁하게 보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재판에 회부될 처지에 놓인 밀티아데스는 자신이 페르시아의 전제정에 항거해 그리스의 자유를 위해 싸워 왔으며, 페르시아를 깨뜨릴 방책을 알고 있다고 설파해 아테네에서 받아들여집니다.

명문가 출신이라 일단 받아들여지자 밀티아데스는 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고, 2년 뒤인 기원전 490년에는 10명의 장군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해, 페르시아가 침공합니다.

마라톤 승리 후 왜 몰락했을까?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한 이듬해인 기원전 489년, 밀티아데스는 75척의 전함을 끌고 전 해에 페르시아에 협조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공격했습니다. 명분은 그럴듯했지만, 속사정은 밀티아데스가 파로스 섬에서 당한 수모를 앙갚음하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파로스를 공격하는 중 밀티아데스는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공격을 접어야 했습니다.

파로스 원정과 밀티아데스의 죽음

원정에 실패하고 돌아온 밀티아데스를 기다린 것은 아테네 시민들의 재판이었습니다. 불과 1년 전 아테네의 영웅이었던 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훗날 사형은 금 50탈란트의 벌금으로 감형되었으나, 돈이 없는 밀티아데스는 감옥에서 부상이 악화되어 숨을 거둡니다.

벌금은 훗날 아테네의 유명 정치인이자 장군으로 성장하는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Cimon)이 갚았습니다.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

키몬은 아버지의 벌금을 갚는 것에서 시작해 아테네의 주요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성장합니다. 그는 페르시아에 맞선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에우리메돈 전투(BC 466경)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대파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아버지가 시작한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아들이 이어간 셈입니다.

밀티아데스의 몰락이 남긴 생각

불과 1년 전에 아테네의 영웅으로 사랑받던 사람이 감옥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은 시민들의 판단에 의해 영웅을 만들기도 하고, 같은 영웅을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했습니다.

밀티아데스만이 아닙니다. 마라톤 이후 아테네를 이끈 테미스토클레스도, 키몬도, 심지어 소크라테스도 아테네 시민들의 판결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여론이라는 형태의 집단 판단이 때로는 정의가 되고 때로는 눈 먼 칼날이 되는 현상은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도 만날 수 있는 밀티아데스의 흔적

마라톤 (아테네 근교)

→ 밀티아데스 동상
→ 전사자 192명 무덤(소로스)
→ 마라톤 평원과 해변
마라톤 전투 현장 방문기

올림피아

→ 밀티아데스의 이름이 새겨진 투구
→ 올림피아 고고학 박물관 소장
→ "ΜΙΛΤΙΑΔΕΣ" 명문이 남아 있음

올림피아 박물관 — 밀티아데스 이름이 새겨진 투구
밀티아데스 관련 유물

역사를 텍스트로 읽는 것과 실제 유물 앞에 서보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경험입니다. 올림피아 박물관에서 2,500년 된 투구에 새겨진 "ΜΙΛΤΙΑΔΕΣ"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밀티아데스는 더 이상 교과서 속 이름이 아니게 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밀티아데스는 어떤 사람인가요?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을 이끌어 페르시아 대군을 격파한 아테네의 장군입니다. 페르시아 제국 내부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어 적의 전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Q. 마라톤 전투에서 밀티아데스는 어떻게 이겼나요?

양 날개에 병력을 집중하고 중앙을 얇게 배치하는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페르시아군이 중앙으로 전진하면 양쪽에서 포위하는 방식으로, 수적 열세를 극복했습니다.

Q. 밀티아데스는 왜 몰락했나요?

마라톤 승리 이듬해 파로스 원정에 실패하여 아테네 시민들의 재판을 받았습니다.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나 부상이 악화되어 감옥에서 사망했습니다.

Q. 밀티아데스의 유물을 어디서 볼 수 있나요?

그리스 올림피아 고고학 박물관에 밀티아데스의 이름이 새겨진 투구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마라톤 현장에는 밀티아데스 동상과 전사자 192명의 무덤이 남아 있습니다.

Q. 밀티아데스의 아들은 누구인가요?

키몬(Cimon)입니다. 아버지의 벌금을 대신 갚은 뒤 아테네의 주요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성장했으며, 에우리메돈 전투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대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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