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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를 빛낸 사람 중에 밀티아데스 Miltiades라는 사람이 있다.  세계 최강의 페르시아 제국이 아테네를 침략했을때 뛰어난 작전으로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유력한 귀족 집안 출신인 밀티아데스는 아테네가 참주들에 의해 다스려지던 기원전 550년에 올림픽 전차 경주 챔피언인 키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즈음은 아테네에 민주정이 붕괴되고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라는 이름의 독재자로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올림픽 전차 경주에서 세번이나 우승을 해 시민들 사이에 인기가 매우 높았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참주 (독재자)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들이 그의 인기를 시샘해 살해했다고 한다.

아테네 민주정을 파괴하고 독재자가 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가 그의 아들 히피아스가 대를 이었다. 밀티아데스는 히피아스 통치하의 아테네에서 조금씩 신분을 높여가 기원전 524년 경에는 행정관 아콘에 임명되었다. 

비슷한 시기 밀티아데스의 형 스테사고라스는 친척이 세운 트라키아의 식민도시 케르소네소스  Chersonese (현재의 Gallipoli Peninsula)에서 참주를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514년 스테사고라스는 정치적 혼란 중에 머리에 도끼를 맞고 죽고 말았다. 아테네의 참주 히피아스는 동생 밀티아데스를 보내 케르소네소스의 참주가 되도록 명했다. 밀티아데스 시절의 케르소네소스 금화는 왼 발을 든 사자 또는 아테나의 두상을 새겨 놓았다. 

기원전 513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트라키아를 침략했다.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케르소네소스를 점령한 페르시아는 밀티아데스를 제국의 신하로 임명하고 스키타이 족과의 전쟁에 끌고 갔다. 

한번은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 신하들을 남겨둔 채 다뉴브 강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 진격했다. 밀티아데스는 남아있던 그리스인들을 설득해 다리를 파괴해 다리우스 1세를 죽이자고 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반대하는 것은 물론 돌아온 다리우스 1세에게 밀티아데스의 음모를 밀고했다. 

위기에 몰린 밀티아데스는 기원전 511년 페르시아 왕의 캠프에서 도망쳐야했다. 그러다 기원전 499년 페르시아를 에게헤에서 몰아내려는 이오니아 반란에 참가하고 기원전 496년에는 자신이 참주를 맡았던 케르소네소스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렘노스 등 섬을 점령해 아테네에 바침으로써 아테네와 좋은 관계를 회복했다.  

이오니아 반란은 페르시아가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침으로써 기원전 494년 그리스 도시들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또 다시 페르시아 왕에게 잡힐 위기에 처한 밀티아데스는 기원전 492년, 가족과 배 다섯척에 나누어 타고 아테네로 피신한다. 하지만 그가 돌아온 아테네는 그가 행정관 아콘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참주정이 꺠지고 이미 15년 전에 민주정이 되어 있었다. 

참주 히피아스 밑에서 행정관을 지냈고 케르소네소스에서는 스스로 참주를 지낸 밀티아데스를 아테네인들이 탐탁히 않게 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밀티아데스는 민회에서 벌을 받을 처지로 전락한다. 유죄가 선고되면 목숨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밀티아데스는 자신이 페르시아의 전제정에 항거해 그리스의 자유를 위해 싸워 왔으며, 페르시아를 깨뜨릴 방책을 알고 있다고 설파해 아테네에서 받아들여진다. 

워낙 명문가 출신이라 일단 받아들여지자 밀티아데스는 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킬수 있었고 2년 뒤인 기원전 490년에는 10명의 장군 중 한명으로 선발되었다. 

같은 해 페르시아는 대함대를 동원해 그리스를 침공했다. 아테네에서 추방당한 히피아스가 가이드 역할을 하며 마라톤에 상륙한 페르시아 군대에 맞서야 할 아테네는 어디서 방어전을 펼쳐야 할 지 고민에 빠졌다. 이때 페르시아의 전략에 통달한 밀티아데스가 마라톤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장군들의 리더인 칼리마커스를 설득하였다. 

 히피아스는 밀티아데스를 행정관으로 임명했던 아테네의 참주였으나 이제는 페르시아의 앞잡이가 되어 마라톤의 해변에 초라하게 등장했고 밀티아데스는 마라톤 전투의 승자로 영광을 차지했다. 권력과 삶의 우여곡절이 드라마틱하게 나타난 순간이었다. 히피아스는 마라톤 전투에서는 살아남았으나 페르시아의 수도에 도착하기 전, 렘노스에서 한 많은 망명객의 생을 마감한다.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한 이듬해인 기원전 489년 밀티아데스는 75척의 전함을 끌고 전 해에 페르시아에 협조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공격했다. 명분은 그럴듯 했지만 속 사정은 밀티아데스가 파로스 섬에서 당한 수모를 앙갚음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파로스를 공격하는 중, 밀티아데스는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공격을 접어야 했다. 무심한 것이 사람들의 인심이라고 아테네 시민들은 공격에 실패한 밀티아데스를 재판에 회부했고 사형을 선고했다.

훗날 사형은 금 50탈렌드의 벌금으로 바뀌였으나 돈이 없는 밀티아데스는 감옥에서 부상이 악화되어 죽고만다. 벌금은 훗날 아테네의 유명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이 갚았다. 

불과 일년전에 아테네의 영웅으로 사랑받던 사람이 감옥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도록 만든 것은 다름아닌 변덕이 죽끓듯하는 사람들의 인심이었다. 민주주의는 2천5백년 전부터 여론이란 형태로 눈 먼 칼날이 되어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가곤 했다.

올림피아에 있는 제우스 신전에 바쳐진 밀티아데스의 투구. 옆면에 ΜΙLTIAΔES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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