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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장소/신화와 역사 (Myth & Place)

바다에 사슬을 채운 왕 — 크세르크세스의 채찍. 신화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인간들

by 유럽탐험 2026.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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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사슬을 채운 왕 — 크세르크세스의 채찍, 2,500년 만에 호르무즈에서 돌아오다

신화와 장소 · Myth & Place

바다에 사슬을 채운 왕
— 크세르크세스의 채찍, 2,500년 만에 호르무즈에서 돌아오다

페르시아는 또다시 좁은 바다 앞에 섰다. 이번엔 채찍이 아니라 통행료다.

“O bitter water, your master lays this punishment upon you,
for you have wronged him though he never wronged you.”

“너 쓰디쓴 물이여, 주인이 너에게 벌을 내리노라.
너는 그를 거스른 죄가 있다.”

헤로도토스 《역사》 제7권 · 헬레스폰토스에 채찍질을 명한 크세르크세스
I

헬레스폰토스, 기원전 480년

기원전 480년 봄, 한 사내가 바다 앞에서 분노로 떨고 있었다. 페르시아 대왕 크세르크세스. 그는 그리스를 정벌하기 위해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군대를 일으켰고,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좁은 물길 헬레스폰토스(오늘날 다르다넬스 해협) 위에 배를 엮어 다리를 놓았다. 수백 척을 밧줄로 묶어 만든 부교(浮橋) — 군대가 마른 발로 바다를 건너게 하겠다는 오만한 공학이었다.

그러나 밤사이 폭풍이 몰아쳐 다리를 산산이 부숴버렸다.

헤로도토스는 그 다음 장면을 이렇게 전한다. 격노한 크세르크세스는 다리를 만든 기술자들의 목을 베라 명했다. 그리고 — 인류가 두고두고 기억하는 장면인데 — 바다 그 자체를 처벌하라고 명령했다. 헬레스폰토스에 채찍 300대를 치게 했고, 시뻘겋게 달군 인두로 바닷물을 지지게 했으며, 한 쌍의 족쇄를 바다에 던져 넣었다.

한 인간이, 바다에 사슬을 채울 수 있다고 믿었다.

II

2,500년 후, 같은 자리

그 페르시아의 후예들이, 또다시 좁은 바다 앞에 섰다. 이번엔 헬레스폰토스가 아니라 호르무즈. 채찍이 아니라 — 통행료다.

III

호르무즈, 기원후 2026년

오늘의 현안부터 정리하자. 호르무즈 해협은 이란과 오만의 무산담 반도 사이를 가르는 좁은 바닷길이다. 전 세계 해상 원유의 20~30%, LNG의 약 20%가 이 한 줄기 물길을 지난다. 지구 에너지 공급망의 가장 가는 목, 이른바 ‘초크 포인트(choke point)’다.

20~30%
세계 해상 원유가
지나는 한 줄기 물길
1,200척+
봉쇄 100여 일간
발 묶인 선박
₩191조
해협에 갇힌
화물 가치
이름의 내력 — ‘호르무즈’는 조로아스터교의 선한 신 아후라마즈다에서 온 말이다. 페르시아의 신이 이름을 빌려준 바다. 그 바다 위에서 페르시아가 다시 값을 매기려 한다는 것은, 우연치고는 너무 길게 이어진 운율이다.

2025년 여름, 이스라엘·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격화되고 미국이 이란 핵시설을 폭격하자 이란 의회는 호르무즈 봉쇄로 응수했다. 봉쇄는 100여 일을 끌었다. 선박 1,200척 이상이 발이 묶였고, 약 191조 원어치 화물이 갇혔다. 선원 1만 명 넘게 해협 일대에 고립돼, 국제해사기구(IMO)가 오만과 함께 철수 작전에 들어갔다.

지난 6월 17일, 미국과 이란이 종전 양해각서(MOU)에 서명하며 통항이 일부 재개됐다. 그런데 여기서 페르시아의 오래된 본능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란은 ‘페르시아만 해협청’이라는 기구까지 만들어 호르무즈를 지나는 선박에게서 통행료를 받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6월 23일, 맞은편 연안국 오만과 공동성명을 냈다. “양국은 호르무즈 해협 내 자국 영해에 대한 주권을 강조한다”며, 항행 관리 체계와 ‘관련 비용(cost)’을 협의할 워킹그룹을 두기로 한 것이다.

크세르크세스가 채찍과 인두로 하려던 일을,
그 후예들은 청구서로 하려 했다.
IV

6월 25일의 반전

그런데 바로 어제, 6월 25일, 이야기가 뒤집혔다. 오만 외무장관 바드르 알부사이디는 바레인 마나마에서 열린 미국·걸프협력회의(GCC) 외무장관 회의에서 못을 박았다. “호르무즈 해협의 향후 관리 체계에 통항료를 부과하는 방안은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이틀 전 이란과 ‘비용 협의’를 말했던 오만이 발을 뺀 것이다.

그 자리에서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한 문장으로 핵심을 찔렀다.

“지구상 어떤 나라도 국제 수로의 이용에
요금을 부과할 권리가 없다.”

2,500년 전 그리스인들이 알았던 것을, 2026년의 외교가 다시 확인한 셈이다. 바다는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V

살라미스의 교훈

역사는 잔인할 만큼 정확한 운율을 가지고 있다. 바다에 채찍질을 명한 그해 가을, 크세르크세스의 운명은 — 또 하나의 좁은 해협에서 결정됐다.

살라미스.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 함대를 일부러 좁은 살라미스 해협 안으로 끌어들였다. 넓은 바다에서라면 수적 우위가 곧 힘이었겠지만, 좁은 물목 안에서는 그 거대한 함대가 서로 부딪히며 스스로를 가두었다. 더 작고 더 날렵한 그리스 삼단노선들이 그 사이를 헤집었다. 크세르크세스는 해안 높은 자리에 옥좌를 놓고 자기 함대가 침몰하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좁은 해협은, 오만한 제국이 자신의 한계와 마주치는 자리였다. 바다를 소유하려 한 왕은, 바다에서 패배했다. 페르시아와 좁은 물길의 이 오래된 악연을 — 호르무즈는 알고 있을까.

VI

스키퍼의 시선

나는 요트를 모는 사람이다. 에게해의 좁은 수로들을, 키클라데스의 섬과 섬 사이를 돛으로 빠져나가 봤다. 그래서 안다. 바다 위에는 톨게이트가 없다.

국제법은 이것을 ‘공해의 자유(mare liberum)’라 부른다. 17세기 법학자 흐로티위스가 정리한 원칙 — 바다는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으며 모든 이의 항행에 열려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원칙은 법학자가 발명한 것이 아니다. 헬레스폰토스가 크세르크세스의 다리를 부숴버린 그 밤부터, 살라미스의 물목이 페르시아 함대를 삼킨 그 가을부터, 바다가 인간에게 거듭 가르쳐 온 사실이다.

바다에 값을 매기려는 자는 늘 있었다. 채찍을 든 왕도, 청구서를 든 정권도. 그러나 수평선은 어떤 깃발의 것도 아니다. 오늘 호르무즈에서 통항료가 철회됐다는 한 줄 뉴스가, 2,500년 전 헬레스폰토스의 채찍 자국과 겹쳐 보이는 이유다.

바다는, 오늘도, 누구의 것도 아니다.
⚓ · ⚓ · ⚓

참고 — 로이터·뉴시스·파이낸셜뉴스·뉴스핌·헤럴드경제 (2026. 6. 23~26) / 부산항만공사 글로벌 해운·물류 동향 / 헤로도토스 《역사》 제7권. 호르무즈 통항료 관련 사실관계는 보도 기준이며, 협상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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