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하로 유명한 코린트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북동쪽 끝에 있다. 아테네 국제 공항에서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따라 한시간 남짓이면 도착한다. 지금은 세계적인 대도시라고 하기 어렵지만 2700년 전에는 에게해 최고의 도시였다.
이곳에는 세가지의 중요한 유적이 있다. 우선 코린트 운하.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오늘날의 코린트로 가는 길목에 있는데 이스트무스에서도 가깝다. 두번째는 아크로코린트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처럼 신전이 있는 방어 성채이다. 세번째는 아크로코린트 아래 평지에 자리잡은 고대 코린트 유적이다.
고대 그리스 역사는 라이벌인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벌인 치열한 경쟁의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도시국가는 서로 너무나 다르기에 더욱 흥미롭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 보면 스파르타는 코린트에게 이용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스파르타가 아니라 코린트와 아테네 간 경쟁의 역사인 것이다.
다툼은 쌍방이 같은 것을 얻으려고 할 때 생긴다. 그리고 아테네와 코린트는 모두 무역을 주력산업으로 한 폴리스였다. 멀리 떨어져있기라도 했다면 모를까, 두 도시는 같은 시장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도자기 교역에서 두 도시국가가 경쟁한 뚜렷한 증거가 있다. 기원전 700년 경, 지중해 연안은 코린트 토기가 시장을 석권하였다. 하지만 200년 후, 코린트 토기는 색이 더 붉고 선명한 아테네 토기로 대체되었다.
코린트는 조선 분야에서도 아테네와 경쟁했는데 기원전 704년에는 사모스 섬에 선박을 수출할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200년 후, 아테네가 해상제국을 구축하면서 위축되고 말았다.
두 도시의 경쟁관계는 수호신에서도 잘 나타난다. 아테네는 수호신을 정할 때 아테나와 포세이돈이 경합을 벌였고 아테나가 이겼다. 그럼 코린트의 수호신은 누구일까? 포세이돈이다.
과연 코린트 사람들이 아테네를 좋게 생각할 수 있을까? 자신의 기득권을 하나 하나 빼앗아 가는 아테네는 앙숙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코린트가 스파르타를 꼬드겨 아테네를 견제하려던 전쟁이었다. 아테네만 없어지면 코린트는 옛 영화를 되찾을 터였다. 그리고 스파르타가 전쟁에 승리했을 때, 코린트는 아테네를 흔적조차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파르타의 거부로 실현되지 않았지만…
아테네가 침체되면서 코린트는 다시 한번 그리스 역사의 주요 폴리스로 등장하고 번성하지만 로마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는 멸망의 아픔을 겪게 된다.
코린트 운하는 19세기 헝가리 기술자들에 의해 완공되었다. 국도를 따라 가다 지나가는 50미터 남짓한 다리는 입구에 표지판도 없다면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지나칠 정도다.
운하는 깍아지른 절벽사이로 흐른다. 30미터 정도는 되어보이는데 차량과 사람이 다니는 다리와 기차가 다니는 다리가 운하를 가로지른다. 알렉산더 대왕이 처음 시도했던 운하. 대왕이 실패한 단 하나의 과업이 되었고, 코린트 사람은 디올코스 diolkos를 만들어 운하를 대신했다. 배를 육지로 끌어올려 반대편으로 옮기는 길을 닦은 것. 지금도 배를 끌어 올리던 곳이 남아있다.
기원전 600년에 이것을 만들었다니 코린트 사람들의 과단성과 실행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아크로코린트
코린트 운하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십여킬로를 달리면 완만한 구릉 뒤로 우뚝 솟은 돌산이 하나 나타난다. 그 산을 향해 남쪽으로 빠져 나오면 길은 이리 저리 꼬이며 산비탈을 오른다.
아테네에 아크로폴리스가 있고, 올라가는 길이 만만치 않지만, 이곳에 비하면 쉽다. 해발 575미터. 아크로코린트. 차로 약 5분 이상 가파르게 올라가야 한다.
주차장에서 차를 움직이는데 자칫 절벽아래로 떨어질 것 같다. 주차 브레이크를 재삼 확인하고 첫 관문인 해자를 건너간다. 세개의 문을 지나야 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난공불락의 요새. 코린트는 방어 성채 마저도 아테네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요새의 출입문 바닥의 돌은 세월에 대리석처럼 반질반진하다. 세계2차대전 때, 독일군이 주둔했을 만큼 요충인 이곳은 비잔틴, 프랑크족, 베네치아, 오스만 투르크가 차례로 지배했다. 1208년. 수성을 하던 레온 스구로스는 성이 함락되려 하자, 말을 탄 채 산 정상에서 절벽아래로 뛰어내려 자결한다.
눈 앞에 성벽이 위압적으로 펼쳐지고, 그 왼편으로 멀리 평야가 바다를 향해 펼쳐진다.
삼중의 문을 지나면 바로 사격과 관측에 사용된 창이 멀리 평원을 바라보고 있다. 어느 신전의 기둥이 초소의 대들보로 재활용되다.
돌계단을 따라 정상으로 오르다 보니 200평 정도 되는 공터에서 고고학자들이 측량을 하고 있었다. 저 담이 2000년 전에 쌓은 것이라고…
서쪽으로 바라 본 저곳 어딘가가 황금시대 인간들이 신들과 노닐며, 일하지 않고도 살던 평야라고 한다.
오전이라도 코린트의 태양은 무척 뜨겁다. 기분 내키는데로 언덕을 오르다간 탈진하기 십상이다. 천천히 흩어진 돌조각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걷는다. 수천년 인간의 흔적은 부서진 토기조각들로 남았다.
무너진 건물. 창의 모양이 독특하다. 이슬람의 모스크 잔해.
창문의 모양이 이슬람 모스크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정상 근처에 도착하니 오히려 약간 평평해진다.
올라온 곳을 돌아보니 연병장 같은 공터 한 켠에 있는 페이레네 샘과 남녀 한 쌍이 깨알같이 보인다. 산 아래는 고속도로가 평야를 가로지른다.
오르던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쪽은 아프로디테 신전으로, 왼쪽은 건너편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천명의 여사제가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마음껏 나누어 주던 신전으로 가는 길은 백척간두 절벽 위의 오솔길이다. 고대의 문화를 오늘의 잣대로 이해하긴 어렵겠지만 여신의 축복을 받은, 시청에서 운영하는 사창가는 생경하다. 건물은 re-open을 위해서인지 여러 인부가 붙어서 보수 공사를 하고 있었다.
발길을 돌려 건너편 정상으로 향하다 나무를 발견하고, 그 그늘로 들어가는데 아테나의 창이 머리를 찌른다. 송곳 같이 무시무시한 올리브 나무의 가시. 가지를 잘라 이파리만 떼면 창이 될 것 같다.
건너편 정상에 서니 쇠락하고 있는 성벽 너머로 코린트 지협과 두 개의 바다가 뚜렷이 보인다.
경비초소가 무너진 터에 앉을만한 육면체의 석재가 있다. 주변엔 무수히 많은 토기의 파편들. 2500년의 세월동안 여기 앉았던 이들의 사연이 지나는 바람 속에서 웅얼거린다.
비옥한 평야와 무서울 것 없는 요새를 가진 코린트. 두 개의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장점까지 가졌는데 무엇이 아테네 보다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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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 성벽은 아무 답이 없이 바람찬 언덕을 지키고 있었다.
고대 코린트
아크로코린트를 내려와 바다를 향하면 한가한 주택가의 좁은 골목들을 지나 고대 코린트의 유적이 나타난다. 유적 입구 근방은 관광객을 상대하는 기념품점과 음식점, 카페가 줄지어 있다. 고대 코린트의 중앙로는 남쪽의 바다에서 아크로코린트를 바라보며 걷는 레카이온 도로이다.
기원전 146년,로마군 사령관 루시우스 무미우스 Lucius Mummius는 아카이아 동맹이 일으킨 반란을 주동한 코린트를 지도에서 없애버렸다. 유적은 마치 로마군이 어제 휩쓸고 지나간 듯 남은 것이 없다. 입구 근처, 박물관에 차고 넘치는 유물들만 과거 의 번영을 증언할 뿐이다.
아테네에게 패권을 넘겨주기 전까지 에게해를 주름잡던 코린트의 수출품 적색토기가 다양한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2500년 전의 그릇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고 아름다운 토기들이 눈길을 끈다.
박물관 앞에는 기괴한 모습의 바위더미가 2층 높이로 서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악녀 메데이아에게 희생당한 제이슨의 두번째 부인, 글라우케 Glauke의 샘이다.
메데이아는 콜키스의 공주로 제이슨이 황금양털을 찾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고 그의 아내가 되어 두 아들을 낳고 살았다. 그런데 제이슨이 자신을 버리고 코린트의 공주 글라우케와 결혼을 하게 되자, 독이 묻은 드레스를 새 신부에게 선물한다. 그 옷을 입자마자 몸이 타 들어간 글라우케는 뜨거움을 견디다 못해 우물로 뛰어들어 죽고 만다. 파우사니우스에 의하면 이 근처에 메데이아가 죽인 제이슨의 두 아들 무덤도 있어야 하는데…
오른편 길을 따라 걸으면 넓은 아고라 광장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대여섯개의 기둥만 남은 아폴로 신전이 시선을 사로 잡는다.
주변의 모든 건물이 무너졌는데도 서 있는 신전 기둥에는 직경 180센티미터, 높이 7미터짜리 화강암이 사용되었다. 모든 것을 쓸어버린 로마군도, 서기 522년과 551년의 대지진도 무너뜨릴 수 없었던 신전의 흔적은 오늘도 맞은 편 산과 그 사이의 바다를 지키고 있다. 아폴로 신전의 뒤로 아크로코린트가 위용을 자랑하듯 내려다 보고 있다.
아폴로 신전 끝에서 본 유적의 모습은 어떤 무심한 사람의 말처럼 돌투성이일 뿐이다. 카메라를 든 나의 그림자만 이 넓은 공간에 혼자다.
그나마 멀리 남쪽 스토아의 모습이 인간의 흔적인 것을 시사한다. 길에는 발굴 때 출토된 석재와 도기 파편 천지다. 토기 파편 하나를 들어 장인의 손자국을 느낀다.
뉘엿뉘엿 가라앉는 태양이 나무 아래 버려진, 백화되어 물러진 기둥 잔해에 작별을 고한다.
코린트 사람들은 너무 상업적이었던 것일까?
아테네에 비해 모든 조건이 좋았던 이곳 사람들에게 환경은 오히려 재앙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아테네는 열악한 환경때문에 시민이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사회가 붕괴할 위기에 처해지자 위대한 솔론의 개혁을 이룰 수 있었다. 만일 풍요로운 곳이었다면 갈등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코린트의 훌륭한 항구, 풍요로운 평야, 안전한 요새는 이들에게서 혁신을 향한 열정을 앗아갔는지도 모르겠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도 코린트인들은 안이하고 도덕관념이 흐릿한 걸로 정평이 났다고 한다.
무너진 신전 기둥의 기초는 말이 없고, 아크로코린트는 절벽 위에 고고하다.
오후 7시. 석양을 받으며 몇안되는 관광객들이 대로를 따라 출구로 가고 있다.
어두워지는 고대 코린트의 시장 아고라에서 아폴로 신전 방향을 바라보면 이 고대 도시의 일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아직 발굴할 것이 남았는지 고고학자들의 발굴 캠프가 있다.
아폴로의 태양마차가 바다로 빠져들려는 시간 신전에 마지막 빛을 선사한다.
정문 밖에 높은 축대를 쌓고 파라솔을 친 식당이 있다. 저녁에 문을 닫는 유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조명이 켜지는 코린트와 아크로코린트의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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